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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일영] 죽창과 민족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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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무국 작성일19-08-08 14:17 조회35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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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 분쟁이 역사적 국면에 들어섰다. 피할 수도 있었겠으나, 이제 과거로 돌아가기는 어려워졌다. 충돌은 피해를 낳겠지만, 손실이 확연해질 때까지 양국 모두 타협을 말하기가 어려워졌다. 게다가 전 세계적으로 국가 간 관계의 틀이 바뀌는 중이다. 강대국들의 민족주의가 새로운 힘을 쌓고 있다. 예측·제어하기 어려운 에너지가 분출되고 있다.  

 

 

일본의 수출규제에 대응하면서 반일 대결의 상징으로 죽창가가 등장했다. 청와대의 조국 전 수석이 드라마 <녹두꽃>을 보고 이 노래를 SNS에 인용했다. 1980년대를 거쳐 온 이들에게 회고와 격동의 감정이 되살아났을 듯하다. 여기에 이순신, 의병, 독립군의 이미지도 가세했다. 한편에서는 민족주의 감성이 전 세대로 확산되었다. 또 한편에서는 여권의 강경 대응 기조가 지배적인 흐름이 되었다.

 

죽창가로 알려진 노래는 고(故) 김남주 시인의 ‘노래’라는 시에 곡을 붙인 것이다. 이미 알려진 것처럼, 김남주 시인은 스스로를 ‘전사’로 부른 급진주의자였다. 김남주의 시 세계에는 민중적 서정성과 전투적 이념성이 병존하고 있었다. 1990년대 이후 김남주의 민족해방·계급해방 이념은 시대적 한계에 부딪혀 현실성을 잃었다. 그러나 그의 민중적 서정성에 기반한 민족주의 감성은 소멸하지 않았고, 한·일 분쟁 국면에서 다시 영향력을 발휘했다.  

 

당장은 민족주의 고조가 여권에 유리하다는 정치공학을 논하는 이들이 있다. 그러나 남북한, 미·중·러·일 등 동아시아 질서의 총체적 전환, 세계경제의 하락세, 한국 정치의 역동성을 고려하면, 섣부른 판단은 금물이다. 또한 한국의 민족주의 전통은 기본적으로 ‘민중적’인 것이었다. 시간을 두고 보면, “피어 눈물로 고여 발등에서 갈라진 녹두꽃”, “아랫녘 윗녘에서 울어예는 파랑새”들이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결국 민생이 문제다. 한·일 간 분업 시스템이 깨진다는 것은 1960년대 이래 형성돼 온 성장체제가 지속될 수 없음을 뜻한다. 단기적으로 내수와 수출의 위축 효과가 불가피하다. 올해 성장률은 2%대 이하로 떨어질 가능성이 높다. 결국 민중의 삶이 어떠한가, 앞으로 어떠해야 하는가에 대한 질문을 피할 수 없다. 새로운 시스템이 어떤 것인지에 대한 대답을 찾지 못하면, 난국이 올 수 있다.
 

한국 근현대사에서 민족주의는 광범위한 단결과 연대의 동력이었지만, 남북 분단과 함께 각자 체제의 정당성 확보에 동원되고 이용되기도 했다. 이에 대해 한반도 전체 민중의 입장에서 민족주의에 기반한 경제체제를 논의한 것이 1960~70년대에 형성된 민족경제론이다. 류동민 교수에 의하면, 민족경제론은 자립적 민족경제, 당위로서의 민족경제, 민족적 생활양식론 등을 주요 구성요소로 한다.

 

자립적 민족경제 논의는 1960년대의 시대적 조건에서 나온 것이다. 분단으로 인한 국민경제의 불균형 심화에 대한 문제의식이 강했고, 수출주도전략과 수입대체전략의 대립이 있었던 시점이다. 1990년대 이후 글로벌 분업이 진전된 생산체제상의 변동에 따라 자립적 민족경제 논의의 현실성은 소멸되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한·일 분쟁을 자립경제의 계기로 삼자는 주장은 별 의미가 없다.

당위로서의 민족경제 논의는 현시점에서 새롭게 발전시킬 수 있다. 당위적으로 추구해야 할 민족경제는 통일을 위한 민족자결의 기초로서의 민족자립경제, 그리고 더 적극적으로 민족공동체를 기초로 한 재생산권의 실현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현시점에서 남북한만의 자립경제는 의미가 없다. 세계경제 속에서 생존과 발전을 담보할 수 있는 재생산권을 어떻게 만들 것인가가 매우 중요한 문제다. 한·일 분쟁은 기존의 분업 체계를 흔들고 남·북·미 사이의 새로운 협력 가능성에도 충격을 주고 있다.

민족적 생활양식은 민족의 감성을 전면화한다는 점에서 비판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이는 범세계적인 자본주의 생산관계 속에서 형성되는 민중 주체의 물적 기초로 해석될 수 있다. 한·일 분쟁에 따른 승자와 패자는 산업, 기업, 지역, 고용형태에 따라 다르게 나타날 것이다. 분쟁 품목에 따라 미국·중국의 경쟁력이 더 커지고 국내 산업공동화 심화로 나타날 수도 있다. 민중 생활의 물적 기초에 어떤 영향이 오는가가 중요한 문제다.  

               

지금은 강대국들의 이익 주장이 거세게 충돌하는 시기다. 우리에게 민족적인 것은, 민중적인 것이면서 또한 세계적인 것이라는 점을 유념해야 한다. 민족경제는 죽창이 아니다. 고립된 자립경제가 아니다. 민족경제는 녹두꽃과 파랑새들의 삶이다. 세계경제 속에서 확보된 생산·재생산의 기초다.

 

 

이일영 한신대 사회혁신경영대학원장

 

경향신문 2019년 8월 6일

원문보기: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908062053005&code=990100#csidx5bfe0ca9ba5a8f9bbcf4a569361a8f1 onebyone.gif?action_id=5bfe0ca9ba5a8f9bbcf4a569361a8f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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